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 바이든/생애 (문단 편집) == 변호사/정치 활동 == 1968년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재수로 1969년에 델라웨어 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고 힘있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 [[국선변호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졸업 당시 85명 중 76등일 정도로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부터 교수들의 신임이 두터웠던 조 바이든은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졸업 직후 델라웨어 주에서 가장 큰 로펌인 프리켓, 워드, 버트 & 샌더스에 취업했다. 로펌 취업 초기 그는 산재를 당한 용접공에게 제소당한 회사를 대리하는 주임 변호사를 도왔다. 재판은 그 용접공이 자신의 실수로 재해를 당했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법정에서 용접공의 아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뭔가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고는 장애인이 되는 영구 손상을 입었지만,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원고를 대리했어야 했다고 느꼈다”며 법정을 나오면서 로펌을 그만두기를 결심했다고 한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68940.html#csidxabf4daabe974328b9f5c413517cdfc2|#출처]] 로펌 취업 초기부터 바이든은 공화당 쪽 모임에 대한 참여 권유가 상당히 많았지만, 당시의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이 이끌고 있었던 만큼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았기에 대부분의 모임 참여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로펌에서 퇴사한 이후 윌밍턴의 빈곤 지역에서 국선변호인으로 주로 활동한 바이든은 가난한 흑인 의뢰인들을 많이 도왔는데, 이 당시의 선택에 대해 조 바이든은 대학시절 흑인 전용 수영장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흑인들의 어려운 삶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택한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흑인과 가까웠던 그의 인생역정은 이후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오바마]]의 [[미국 부통령|부통령]]'''이라는 타이틀과 강한 시너지를 일으켜 흑인들의 열광적 지지를 끌어모으는 원동력이 되었고, 흑인이 민주당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남부 주들의 선거인단을 쓸어담으며 민주당 경선에서 주류 단일후보로 우뚝 올라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국선변호인]] 활동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역 로펌에 재취업하게 되는데, 이곳을 통해 민주당 내 개혁을 다루는 포럼에 참여하게 된 바이든은 이 모임에서 델라웨어 뉴캐슬 카운티 출마 권유를 받게 된다. 당시 뉴캐슬 카운티는 공화당 강세 지역이라 민주당에서는 후보로 나서려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는데, 바이든은 그런 지역에 출마해 2천 표 차이로 [[1970년]] 11월 뉴캐슬 카운티의 카운티 의회 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델라웨어 지역에서 바이든 외에는 대부분의 후보가 참패하면서 그 힘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덕분에 바이든은 28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델라웨어 민주당에서 상당히 저명한 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 민주당으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해당 선거구의 상원의원은 재선의 케일럽 보그스 (J. Caleb Boggs)로 델라웨어 지역에서 연방 하원의원 3선, 주지사 재선, 연방 상원의원 재선을 역임하고 바이든이 갓난 아기일 때 처음으로 공직에 선출된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정계 은퇴를 고려하던 그의 후계를 두고 공화당에 분열이 생기는 바람에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까지 나서서 한 번만 더 출마하라고 보그스를 설득했다. 당시 델라웨어 민주당 내에서는 그 누구도 경쟁 후보인 보그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로 나가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바이든은 젊은 나이에 어차피 카운티 의원 재선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이유로 떠밀리듯이 출마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카운티 의원은 한번만 하고 이후에는 자신의 로펌을 꾸리는 일에 집중하려 했었다고 한다. 사실상 패전 처리 투수 역할이었던 갓 서른의 바이든은 기적적으로 3천 표 차로 보그스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고 미국 역사상 일곱 번째로 어린[*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youngest_members_of_the_United_States_Congress#List_of_youngest_U.S._senators?wprov=sfla1|영문위키]] 기준. 상원의원 직선제 도입(1914년) 이후로는 두번째로 어리다.] 상원의원이 되었다. 미국 연방 상원은 30살부터 가능한데 어떻게 29살의 바이든이 승리했었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연령 제한은 출마나 당선 시점이 아니라 취임 시점이기 때문에 바이든은 아슬아슬하게 출마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18일, 아내 닐리아와 세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하러 차를 끌고 나갔다가 교차로에서 트레일러에 추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 닐리아와 장녀인 나오미가 사망했다. 장남 보 바이든은 뼈가 여러 곳 부러져 전신 깁스를 하게 됐고 차남 헌터는 머리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직원 채용을 위한 면접으로 워싱턴에 있던 바이든은 지미에게 전화를 받은 누이 발레리가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인생의 발판이 발밑에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때 바이든이 보와 헌터 때문에 워싱턴 D.C.에서 선서할 수 없다고 하자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였던 마이크 맨스필드 의원이 병원으로 상원 서기를 보내 별도로 선서하도록 하여, 결국 그는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윌밍턴 종합병원에 입원한 아들들의 병실에서 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바이든은 힘들게 얻은 상원의원직을 포기하려 했다. 바이든은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였던 [[https://en.m.wikipedia.org/wiki/Mike_Mansfield|마이크 맨스필드]] 의원에게 상원의원직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이 계속 전화해 상태를 확인했고 맨스필드도 "내게 6개월만 줘" 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상원의원 취임식에서도 대놓고 "만약 제가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상원의원이 될 수 없으면 주지사 당선자인 트리비트 씨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 상원의원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해당 주의 주지사가 임시로 다른 인물을 상원의원에 임명한다.] 좋은 상원의원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좋은 아버지는 찾을 수 없거든요."라고 발언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발레리가 조의 두 아들을 돌보기 위해 노스 스타의 집 근처로 이사하는 등 가족들이 상원의원직에 취임할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의원직을 이어가게 된다. 이때 바이든은 사고 트라우마를 겪던 아이들에게 반드시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윌밍턴 역]]에서 워싱턴 D.C.의 의사당까지 매일 통근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도록 워싱턴을 오가는 차에 전화기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에게 브리핑하는 중에도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 직원이 전화를 연결한 적도 있었다고. 최연소 상원의원이었던 초선의 바이든은 사고와 상관없이 나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 초선 임기 내내 당시 현직 상원의원 중 최연소 의원이었다.]에도 직면해야 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이던 바이든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를 처음 만났을 때 키신저에게 "직원들은 출입이 안 되는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비드-덴'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었으며,[* 바이든의 자서전에 따르면 비드-덴이라고 부른 키신저를 향해 [[존 덜레스|덜레스 장관님]]이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민주당 국제외교분과장이던 [[https://en.wikipedia.org/wiki/W._Averell_Harriman|애버럴 해리먼]] 의원에게는 회의에서 항상 "젊은이들의 생각을 말해봐, 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동료 상원의원들도 바이든을 친절하게 보살펴주었다. 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의원은 바이든이 굉장한 커리어를 쌓게 될 것이라며 예찬했고, 아이들과 가족들에 대해 물으며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부통령까지 해드신 고인물의 안목-- [[에드워드 케네디]]는 바이든의 사무실을 정기적으로 찾아와 위로했는데, 케네디가 데려간 상원 체육관에서 벌거벗은 [[제이콥 재비츠]]([[제이콥 K. 재비츠 컨벤션센터]]의 그 재비츠가 맞다)와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미주리 민주당 의원 스튜어트 사이밍턴을 마주쳐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https://youtu.be/Vxv2u02dAX0|#]] 상원 식당에서 바이든이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 꽉 찬 민주당 테이블에서 빈자리를 찾던 상원 군사위원장 [[존 C. 스테니스]]를 보고는 식사를 다 하지도 않은 채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스테니스 의원이 초선의 바이든을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스테니스는 1988년 은퇴하며 러셀 빌딩의 집무실을 바이든에게 물려주었다. 1974년에는 [[휴버트 험프리]]의 부탁으로 선거운동을 위해 [[애틀랜타]]를 방문했는데, 그 때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조지아주|조지아]] 주지사였던 카터가 바이든을 자기 집에 초대해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1976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휴버트 험프리가 1976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바이든은 워싱턴 정계에서 카터 대통령을 지지한 최초의 의원이 되었다. 카터 행정부 시기 바이든은 대통령의 부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소련 수상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4%B8%EC%9D%B4_%EC%BD%94%EC%8B%9C%EA%B8%B4|알렉세이 코시긴]] 등 공산권 지도자들과 만나며 외교 경험을 쌓았다. 훗날 바이든은 [[지미 카터]]가 중산층 노동자의 표심을 잃어가던 민주당에 필요한 전환기적 인물이었지만, 전국적인 이슈를 많이 알지 못했던데다 외교정책 경험이 전혀 없던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바이든은 아직 초선 상원의원이던 1977년 영어 교사 [[질 바이든|질 제이콥스]](Jill Tracy Jacobs, 1951-)와 뉴욕의 유엔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공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데다 두 아이의 새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해 결혼을 망설이던 질을 설득하기 위해 바이든은 상원의원 재선까지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질이 "당신의 꿈을 부정해야 한다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 결혼과 상원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담으로, 둘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바이든이 퇴근길에 들른 [[델라웨어주]] 윌밍턴 공항의 광고판에 등장한 질을 보고 '저런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동생 프랭키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다고. 1988년에는 당시 역대 2번째로 젊은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젊은 이미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연설[* 문제의 발언은 1987년 8월 23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으로 청문회를 준비하느라 토론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바이든이 클로징 멘트로 키녹의 연설을 인용하고서 사후에 출처를 밝히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과 시러큐스 대학 로스쿨 첫 학기의 리포트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민주당 경선 경쟁자였던 [[마이클 두카키스]]에 의해 불거졌다.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보크 대법관 후보자[* 보크는 미 보수파 법조계의 대표 인물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송무차관을 지냈다. 이 당시 닉슨은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아치발드 콕스를 해임하라고 법무부에 명령을 내렸는데, 장관-부장관 모두가 항명하고 사퇴하자 보크가 장관 권한대행직을 맡아 닉슨의 명에 따라 콕스 특검을 해임했던 전적이 있다. [[민주당(미국)|민주당]]은 법 해석을 둘러싼 원전주의와 임신중절 반대, 인종 및 성차별적 발언을 문제 삼아 낙마시켰다. 법사위원장으로 청문회를 진행한 바이든은 '인권이 헌법에 선행한다'는 논리로 '그 권리는 법에서 비롯된다'는 보크의 주장을 반박하며 보크의 낙마를 주도했다.]의 인준 거부를 추진하고 있던 바이든은 청문회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해 결국 경선을 포기했다. 경선에서 사퇴한 뒤에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청문회를 주관하며 뛰어난 연설 솜씨로 주목을 받던 바이든은 1988년 초 아이오와 코커스가 열리던 날 [[펜실베이니아주]] 로체스터의 호텔에서 [[뇌동맥류]]로 쓰러졌다. 뇌동맥이 파열된 탓에 월터 리드 군 병원에서 두 차례 큰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매던 바이든은 뇌동맥류 외에도 [[폐색전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뇌동맥류를 신경이 눌린 것으로 진단한 --돌팔이-- 의사가 폐색전증까지 단순한 소화불량으로 진단하는 바람에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 등 상원을 비운 동안 업무를 돌봐 준 동료들의 도움으로 바이든은 7개월 만에 재활을 마치고 복귀했다.[* 바이든은 수술 전에 보와 헌터 두 아들에게 자신의 묘비명으로 '아들, 형, 남편, 아버지, 스포츠맨'을 새겨달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회복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안부 전화도 가족들이 받게 할 정도로 재활에만 힘썼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에드워드 케네디]]는 '친애하는 아일랜드 출신 위원장에게'라고 적은 아일랜드 사슴 동판화를 액자를 가지고 기어이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이후 2008년까지 36년 동안 델라웨어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고 [[코소보]] 문제에 특히 많이 관여했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코소보 사태에 [[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공화당(미국)|공화당]] 의원인 [[존 매케인]]과 결의서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NATO]]가 보스니아에 개입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고, [[밥 돌]] 의원과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해 학살과 강간을 일삼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라도반 카라지치]]를 대면하기도 했다. 결국 NATO군의 공습(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이 내전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클린턴은 휴가 중에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코소보 사태를 방관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떠봤다고 한다. 바이든이 매우 영향력 있는 중진 상원의원이었음을 증명하는 일화. 비슷한 시기에 미국 최초의 여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인 1990년, 여성에 대한 강력 범죄와 증오 범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뒤로부터 거의 홀로 법안을 꾸려나가다가, 점점 늘어나는 여성 상원의원들과 관련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바이든-해치 범죄 법안으로 알려진 여성폭력방지법을 통과시켰다. 1991년 아버지 부시가 주도한 [[걸프전]] 당시에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2003년 아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는 용인[* [[이라크 전쟁]]은 [[명분]] 자체는 워낙 확실했다. [[사담 후세인]]이 [[9.11 테러]] 희생자들한테 '''잘 죽었네, 천벌 받았다 ㅋㅋㅋ'''라고 대놓고 [[고인드립]]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목적이 매우 허술했다. 이는 부시가 9.11 테러에 대한 보복이 아닌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침공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명분이 아닌 다른 명분을 들고 나왔다가 목표를 잃어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졌다.]했고, 대신 사담 후세인의 제거에는 반대했다. 부시와 네오콘들의 무책임한 사후 처리로 이라크가 총체적인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요르단의 이라크 경찰 훈련 센터를 방문한 이후 미군과 영국군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고 이라크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오합지졸인 경찰들의 훈련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바이든은 신고립주의를 추구한 네오콘 세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라크와 [[관타나모 만]]의 수용소에서 무슬림 죄수에 대한 학대를 조장한 [[도널드 럼스펠드]]는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등 네오콘 세력들과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바이든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일정상 해병대 수송기의 보조석에 탑승하게 되었는데, 럼스펠드가 이륙 직전에 바이든의 탑승을 막아 전쟁 영웅이었던 [[콜린 파월]]에게 위성전화를 걸어 현장의 군인들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해야 했던 적도 있다. 의외로 부시 본인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역시 부시의 가장 큰 실수는 전통적 국제주의자였던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이 아닌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 [[존 볼턴]] 등 [[티 파티|무능하고 위험한 신념을 가진 이들]]을 중용해 미국을 분열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가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하자 4년 동안 미국이 더 분열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2008년 대선 출마를 고민하게 되었다. 1987년의 첫 도전 때처럼 경쟁자들에게 공격당하고 가족들까지 사생활 노출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에 출마를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질 바이든]]을 비롯한 가족들이 오히려 출마를 지원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